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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2013)

아시아 필하모닉 연주회(베토벤,말러) - 200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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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트리플 콘체르토. 피아노 리히터, 첼로 로스트로포비치, 바이얼린 오이스트라흐, 지휘 카라얀이 모여 연주하는 음반을 들으며 감동하던 음악인데 너무 빨리 질려버렸다. 베토벤의 음악 전체가 지루하게 느껴지고 답답하게 느껴질 즈음에 이 음악에 대한 감동도 사라진 듯 하다. 시간이 지난 후, 베토벤의 음악이 다시 관심의 범주로 들어오고, 경외의 대상으로 다시 자리매김 하기 시작하던 때에도 여전히 트리플 콘체르토는 관심 대상 밖에 머물러 있었다. 1년에 한번 정도는 공연에서 접하게 되는 것 같은데, 그 때마다 곡 전체에서 계속 변주되며 진행되는 주요 선율이 나오는 첫 장면부터 '언제 끝나나'하는 생각이 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나와는 맞지 않는 음악이다.

결국 이날 연주의 첫곡인 이 곡에서 내가 한 유일한 기대는 정명훈이 피아노와 지휘를 함께 맡아서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정명훈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실연으로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정도만으로도 어느정도의 기대를 충족할 만한 아이템이다.

말러 5번은 누가 연주한다 하더라도 일단 연주만 있다면 듣고 싶은 음악이니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작년에 감동적인 공연을 선사해주었던 정명훈과 아시아필의 조합이라니 사실상 이 날 공연에서 가장 기대하는 아이템이다. 사실 이 아이템 때문에 사실상 마음에 와닿지 않는 트리플 콘체르토까지 정명훈의 피아노 연주니 뭐니 하는 이유를 들며 나름의 메리트를 부여하는 게다.

첫곡인 트리플 콘체르토는 썩 좋지도, 썩 나쁘지도 않았다. 연주 기술적인 면에서 큰 흠을 찾을 수는 없어보였다. 피아노, 첼로, 바이얼린간의 상호 연결되는 이음새도 크게 문제 삼을 만한 점은 없는 듯 하다. 하지만 불꽃 튀는 대결이나 긴장감, 또는 한 호흡처럼 이어지는 잘 짜여진 앙상블 같은 것도 역시 찾을 수 없는 그저 그런 연주였다. 그래도 좋았던 점을 부각시킨다면, 눈에 띄는 앙상블의 부조화나 삐걱거림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 연주였기 때문인지 40여분의 연주 시간이 그다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일 듯 싶다.

말러 5번. 첫 시작은 정말 놀라웠다. 트럼펫으로 시작하는 첫 시작은 실연으로 보았던 말러 5번중에 가장 안정감 있는 진행을 보여주었다. 관의 독주, 특히 첫 시작을 금관의 독주로 시작하는 곡은 늘 듣기 전부터 미리 앞서서 긴장을 하게 만든다. 아주 작은 음의 흔들림 조차 엄청나게 부각되어 느껴지는 것이 바로 금관의 독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보통 금관 독주 주자들도 긴장한 상태에서 연주하게 되고, 또 이러한 긴장이 음의 흔들림을 만들어내는 악순환이 이루어진다. 정말 이렇게 자신있게 지르는 말러 5번의 금관 독주는 실연을 통해 들어본 적이 없다. 말러 5번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곡에서도 금관의 독주가 이렇게 깔끔하게, 자신있게 나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객석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금관 독주자의 붉게 변하는 얼굴색조차 곡의 첫 시작의 환상적인 오프닝을 장식하는 듯 했다.

그렇게 시작한 1악장은 참 좋았다. 이 페이스로 끝까지만 가준다면 더이상 바랄게 없는 연주였다. 하지만 2악장에서 흔들리고 3악장에서 긴장이 풀렸다. 4악장 '아다지에토'에서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아시아필의 위상에 걸맞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었는데, 5악장의 시작은 1악장과 정 반대로 관악 솔로의 첫 시작이 흔들리면서 정상적인 페이스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결국 5악장은 첫 시작의 흔들림에서 정상 페이스로 오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 후에 마지막 클라이맥스에 거의 다 와서야 비로소 말러의 혼이 부활하는 듯한 기세로 몰아치며 최정상의 고지에서 마지막 음을 뽑아냈다.

연주의 좋고 나쁨과 상관 없을 수도 있다 원래 정명훈이 지휘하는 연주는 늘 박수갈채였으니. 어쨌든 그런 마지막의 몰아침으로 인함인지 아니면 정명훈이 지휘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박수 갈채가 쏟아지긴 했지만, 연주 전체로 볼 때에는 작년의 아시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과는 확연히 달랐다. 작년 연주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연주의 치밀함과 함께 느껴지는 단원들의 곡 전체를 조망하는 듯한 여유를 이번 연주에서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작년의 드보르작과 브람스의 교향곡이 단원 개개인의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여유를 가지고 매끈하게 연주할 수 있는 정도의 곡이었다면 이번 연주의 트리플 콘체르토나 말러 5번은 단원 개개인의 일정 수준 이상의 역량을 바탕으로 한다 하더라도 일정 시간 이상의 호흡 맞추는 시간을 담보로 하는 음악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년에 미치지 못하는 아시아필의 연주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작년 공연이 창단 10주년 공연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상 6년만에 재결성한 연주였다면 금년 공연은 2010년 상설 오케스트라를 목표로 하고 있는 아시아필의 연주회가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것에서 추가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지난해 연주회는 매 악장간 박수가 터져나오고 급기야는 곡이 진행되는 중간에 정말 시끄러운 핸드폰 벨소리가 터져나와 한참 울릴 정도로 관객 매너가 꽝이었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는데 첫 곡의 악장 사이에서 박수가 전혀 나오지 않아 이번에는 좀 다르려나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이곳 저곳에서 터져나오는 핸드폰 벨소리. 말러 5번 4악장 시작전에 연속해서 울린 벨소리며, 실제 벨이 울린 건지 환청으로 들리는 것인지 모를 소리들까지 다 합치면 대여섯번의 벨이 울린듯 하다. 말할 것도 없이 이번에도 관객 매너는 꽝이었다. 그런 관객들의 몰상식이 이날 연주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있어 주요한 한 축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어찌되었든 아시아 필하모닉. 향후 몇년간 안정적인 수준에 안착하기까지 풀어야 할 작은 문제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기대할 만한 점들이 많이 있는 주목해봐야 할 오케스트라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