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chive (~2013)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 2009.05.13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연에 가기 전 며칠동안 동네 산을 오르며 체력을 보충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된 공연이었다. 거의 3시간 동안 꼬박 서서 봐야만 하는 공연인데다가, 공연이 있기 전의 오후시간을 홍대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보낸 후였다. 아마 평소의 나였더라면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진 채 멍한 상태에서 3시간 동안 괴로워하다 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며칠간 쌓아놓은 체력으로 인해 쉽지 않은 곡들에도 흥겨워하며 3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당 일자 공연의 공식 포스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날의 공연이 '장기하와 얼굴들'의 단독 공연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상상마당 홈페이지의 공연 스케줄에는 이날의 공연으로 '장기하와 얼굴들'만 적혀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2시간 내내 장기하와 얼굴들의 공연을 볼 것이라, 정규 음반에 실린 곡들은 한번씩은 다 들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위의 공식 포스터가 나왔을 때에도 출연진에 대해 적혀 있는 부분에는 별다른 신경이 쓰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이날의 공연은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라는 '붕가붕가레코드'사의 모토를 이루어내기 위한 '지속 성장을 위한 신 사업전략'이라는 소제목하에 붕가붕가레코드사에 소속되어 있는 밴드들이 총 출동하는 공연이었다.

이를 전혀 캐취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공연시작 시간 8시부터 바로 장기하와 얼굴들의 공연을 볼 수 있을거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고, 연이어 나오는 밴드들의 공연에 때론 흥겨워 하기도, 때론 약간 지루해하기도 하며 내내 서 있었다. 거의 정확히 8시에 시작한 공연은, 10시가 넘은 시간에 마지막 밴드로 '장기하와 얼굴들'이 나와 4~5곡의 노래를 한 후 10시 30분 정도에 끝이 났다.

오후 일찍부터 홍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여유를 부린 덕에 공연 입장도 미리 줄을 서 일찍 들어올 수 있었고, 나보다 더 여유가 있거나, 혹은 더 열정이 있는 몇명의 사람만을 앞에 두고, 관객들 중 3번째 줄 정도에 자리잡고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앞에는 나보다 월등하게 키가 큰 분들이 계시지 않아 시야를 가리지 않을 수 있었고, 무대 높이도 적당하여 서서 공연을 본다는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정말 최고의 위치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날 가장 신나고 즐거웠던 밴드는 당연 '술탄 오브 더 디스코'였다.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거의 마지막이다 싶은 공연이었는데, 인디밴드계에서 유일한 립싱크 밴드에 코믹한 댄스 그룹이란다. 정말 재미있고 신나기 그지 없어 이 친구들의 율동(?)을 따라하고픈 욕망을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공연이 끝난 후에 이 친구들의 싱글 음반을 구매해서 다시 들어보니 라이브에서의 그 열기는 느낄 수 없더라는... 역시 이런 음악은 라이브로 들어주는 것이 제 맛인듯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연의 특별 게스트로 초청된 '브로콜리 너마저'. 집에 아내가 사다 놓은 음반이 있어 얼핏 몇번 들었던것 같은데, 이 밴드가 무척 감미로운 발라드를 연주하는 밴드라는 것을 이 공연에서야 알게 됐다. 밴드 이름만 듣고는 꽤나 시끌벅적한 락밴드라 생각했었는데... 암튼 곡은 익숙하지 않아도 밴드 이름을 수도 없이 들은 효과때문인지 금새 익숙해지는 곡들이었던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드디어 장기하와 얼굴들의 공연이 시작됐다. 이미 티켓팅을 하면서 잠시 연습중이던 모습을 문틈 사이로 보긴 했지만, 정말 TV에서 보던 그대로다. 장기하 이친구는 평소에 노래 부를 때에도 그런 묘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건지... 암튼 유명세를 탄것도 사실이고, 그 유명세 때문에 내가 이런 공연에 직접 돈내고 와서 공연을 보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유명세를 빼고 봐도 오늘 나온 밴드들 중에 내공의 수준이 한단계 위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위의 사진은 '나를 받아주오'를 부르는 장기하와 미미시스터즈의 모습이다. 해당 곡이 끝난 후 미미시스터즈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보여준 퍼포먼스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건 '그 남자 왜'라는 곡을 부를 때다. 이 사진을 찍고 난 후, 그간 충전 한번 하지 않았던 똑딱이는 전원 부족으로 죽어버렸다. 이 후 '별일 없이 산다'를 부를 때에는 TV에서 볼 수 없었던 장기하의 몸부림(?)을 볼 수 있었고, 장기하가 몸을 청중들 속으로 날리기 까지 했었는데 나도 장기하 등을 짚고 옮기는 데에 한몫을 담당했다. 옮기다가 내 정수리와 장기하의 뒷머리가 쿵 하고 부딪히기도 했고...

놀라웠던 것은, 장기하가 청중속으로 몸을 날리기 전 안경을 벗어 자신의 자켓 속주머니에 넣었는데, 몸을 날리자 한 더벅머리 남자가 기다렸다는듯 장기하의 자켓을 벌려 속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그의 안경을 태연히 꺼내어 가져가 버린 일이다. 무대에 올라온 장기하는 안경이 없어진 것을 알고 안경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이건 아니다 싶어 '안경 돌려주라'고 고함 몇번 지르고, 안경을 가져간 사람을 지목까지 했지만 나의 소리는 소음에 묻혀버렸고, 장기하는 안경이 없어 다소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그의 '청년실업'밴드 시절의 '기상시간은 정해져 있다'를 앵콜곡으로 부르며 공연은 끝났다.

대학시절 아는 후배가 공연을 한다기에 가본 적은 있었지만, 이런 인디밴드들의 공연에 돈 내고 직접 가본 적은 처음이다. 티켓팅을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 속에서 태연히 앉아서 책 읽다가 얼떨결에 방송사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마치 인디 음악에 대해 꽤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사실 아는 것 전혀 없는 상태의 첫 경험이었다. 이날 나온 밴드들의 음악 전부가 맘에 드는 것은 솔직히 아니었지만, 전혀 이런 쪽에 무관심한 나에게까지 그 유명세가 전해진 '장기하와 얼굴들' 너머 그 안쪽에도 좋은 음악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던 시간인듯 싶다.

시간이 되는 만큼 좀 더 관심을 갖고 이쪽 영역을 탐색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