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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2013)

베르디 '팔스타프', 국립오페라단 - 2013.03.23


지난 몇 년 동안 오페라와 친해지려 몇 번의 시도를 했었는데 번번히 실패했다. 그렇게 오페라와 친해지기 어려웠던 이유중의 하나는 아마도 음반으로만 오페라와 친해지려 했던 때문인 것 같다. 음반으로 듣고 있자니 내용도 모르겠고, 매번 대본을 옆에 두고 볼 수도 없으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후 오페라에 한걸음 더 다가서보자는 차원에서 일단 메가박스에서 상영하는 오페라 실황을 보기 시작했는데 영 적응도 안되고 결국 오페라는 여전히 나랑 맞지 않는 장르라는 생각이 더 굳어지는 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꾹 참고 계속 보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마음도 편안해지더니 결국 내가 악기 소리만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도 즐기고 있게 되어 버렸다.

이제야 비로소 올해는 오페라와 친해지는 원년으로 삼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 일단 워밍업 차원에서 메가박스에서 한층 더 많아진 여러 오페라를 감상한 후에, 국립오페라단의 금년 시리즈 중 첫 작품인 베르디의 팔스타프를 티켓이 오픈 하자 마자 바로 예매를 했다. 처음 접하는 장르의 공연은 무조건 좋은 자리에서 제대로 감상을 해야 제대로 친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자리도 무리를 해서 좋은 자리로 예약해 놓았다. 이미 한참 전에 예약해 놓은 공연인데, 갑자기 주말에 일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져 약간 걱정했는데, 다행히 토요일 오후는 쉴 수 있어 들뜬 마음으로 공연을 다녀왔다.

지금까지 영상으로만 오페라를 접하고, 실연으로는 처음 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로울 수 밖에 없었다. 오케스트라 피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래로 움푹 파여서 거의 보이지 않았고(2층이면 잘 보일 텐데 1층 앞자리에서는 지휘자 머리 위쪽만 살짝 보였다), 막과 장 사이에 움직이는 무대를 직접 보는 것도 신선했다. 영상으로만 볼 때에는 스피커 볼륨이 충분해서 인지 배우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잘 들렸는데, 생각보다 작은 소리에 처음엔 적응하기 어려웠다. 1층 앞자리였으니 거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원래 그 정도 소리인데 내가 너무 스피커 음향에 적응되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가끔 성악을 들을 때에는 그 정도로 작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는데, 아무래도 잔향이 좀 짧은 오페라 하우스 음향 특성이 성량이 더 작게 느껴지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대 위쪽에 자막을 보여주는 스크린이 있는데 1층 앞쪽에 앉아서인지 무대와 자막을 번갈아 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것 또한 이전까지 편하게 영화관 스크린에 무대와 함께 보여주는 자막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메인 포스터에서는 이를 드러내고 웃던 팔스타프가 왜 여기에서는 입을 다물고 웃고 있을까?)


첫 오페라 실연을 본 입장에 공연에 대해 크게 평가를 내릴 만한 것은 없는 것 같고,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일한 희극 오페라라는 <팔스타프>는 극 전체가 붕 떠있는 듯 발랄하다. 심각한 장면도 없고, 인물간 갈등이 없진 않지만 결국 마지막엔 다 웃으며 손잡고 랄랄라 노래 부르며 끝나는 신나는 오페라이다. 특히 극의 엔딩인 3막 마지막 장면은 이미 공연이 다 끝나고 출연자들이 무대 인사하러 나온듯, 모든 이들이 함께 사이좋게 앉아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무대의 모습 중에는 1막 2장의 포드 저택의 정원에서 연인인 나네타와 펜톤이 서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내용에 따라 조명의 색이 밝은 하얀색(형광등 불빛)에서 주황색(백열등 불빛)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변화하던 것과, 3막 2장에서 무대 뒤 달이 실제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떠오르는 모습(아래 사진은 달이 다 떠오른 장면이다)이 인상 깊었다.

베르디 오페라는 국립 오페라단에서 다음 작품으로 준비 해 놓은 것도 있고, 메가박스에서 상영하는 메트 오페라 시즌은 물론 그 외에 유니텔 클래시카를 통해 작품을 들여오는 쪽에서도 오페라 축제등의 상영을 기획하고 있다고 하는데 모두 베르디 오페라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페라라는 장르가 편해졌고 좋아졌으니 앞으로는 좀 느긋하게 즐겨봐야겠다.

(저 달이 처음에는 나무에 가려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 달 처럼 저렇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