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다닌 교회 주일학교 때문에 생긴 폐해가 있다면 그 중에 한가지는 아마도 피아노와 기타라는 악기에 대한 편견을 갖게된 것일듯 싶다. 큰 목소리로 부르는 찬양 소리를 그저 뒤에서 뒷받침하며 음을 맞춰주고 화음을 넣어주는 역할을 피아노와 기타가 주로 하다 보니 어린 마음에 이 두 악기의 독주 악기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망각해 버리게 됐던것 같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굳어진 편견은 쉽게 풀리지도 않아 오랜 시간이 흐르고, 피아노 독주 음반을 들으며 그 소리에 매료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막상 피아노 독주 연주회를 가려 할 때마다 ‘뭐 들을 만한 게 있을까?’하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여전히 불쑥 튀어나온다.

오늘 앉았던 2층 제일 앞 줄의 가운데 좌석에 앉아 김선욱의 피아노 연주를 들은 지 몇 분 지나자 문득 든 생각이 바로 앞에서 말한 교회 주일학교에서의 피아노의 위치와 역할이었다. 미세한 타건을 통해 들려오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음량의 소리가 마지막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는 그 뒤를 바로 이어 폭풍처럼 몰아치는 음량을 토해내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연주를 들으며 다시 한 번 피아노라는 악기 한대가 가진 소리의 역량에 촌스럽지만 또 다시 한번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피아노 독주회에 올 때 마다 오케스트라 못지 않은 표현의 폭을 가진 피아노에 늘 매번 놀라는 것 같다.

내가 앉은 자리의 음향도 한 몫을 했다. 2층 제일 앞 줄의 가운데 좌석의 소리가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 LG 아트센터의 음향이야 개관할 때부터 주목 받았던 사실이고 여러 번 확인했던 사실이지만 오랜만에 갔던 때문인지 여전히 잘 관리되고 있는 공연장의 음향이 상당히 만족스러웠고 신선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귀로만 피아노 소리를 좇아 보면 정면의 피아노에서뿐만 아니라 좌우의 벽과 천장을 통해 반사된 피아노 소리가 내 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하면 될까. 거의 정면을 기준으로 양쪽 모두 120도 정도 방향까지 소리가 반사되어 들어온다는 느낌이 들었고, 마치 물방울이 여러 번 튀어 미세한 방울이 되는 것처럼 소리가 아주 부드럽고 미세하게 흩뿌려져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기분이 얼마나 괜찮았는지 연주회 동안 여러 번이나 앞에서 연주하는 연주자의 모습을 보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눈을 감고 전 방향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즐겼다.

1988년생인 김선욱의 연주를 처음 본건 지난 2007년 내한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연주회에서였다. 당시 아직 만 20살이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의 연주를 보며 저토록 젊은 나이의 소년의 손가락에서 그처럼 패기 넘치면서도 깊이 있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에 깜짝 놀랐었다. 어린 소년이기에 아직 원숙한 소리를 들려주는 연주는 아니었지만 그 연주를 들으면서, 이대로만 성장해준다면 분명 머지 않은 미래에 대가의 반열에 오를만한 연주자가 되겠구나 하는 기대를 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에 몇 번 김선욱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었으나 번번히 놓치다가 이번에 드디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시리즈 중 2012년 4개의 시리즈에 이은 2013년 4개의 시리즈 중 첫 공연을 통해 오늘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첫 연주곡인 소나타 제 17번 템페스트 연주가 시작되고, 초반의 산만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연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자 6년전에 쨍 소리가 들릴 듯 깔끔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연주 스타일을 보여줬던 그 젊은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연주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거기에 원숙미를 더해왔음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6년 전의 그 발랄한 모습은 다소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대신 조금 더 과묵하고 예의 바른 연주를 하는 청년 연주자의 모습이었지만 젊은 시절의 패기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연주 스타일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라는 연주곡도 이런 느낌을 받는데 한 역할을 했을 듯 싶다. 어떻게 보면 참 쉬운 것처럼 들리고, 신나는 것처럼 들리는 곡인데, 또 다른 때에 들으면 끝 모를 깊이와 인간의 고뇌가 담긴 무거운 소리로 들리곤 하는 게 베토벤 음악의 특징인 것 같다. 많이 들어도 너무 많이 들어서 간혹 지겹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또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었는가 하는 감탄에 입 벌리고 멍하니 듣게 되는 게 베토벤 음악이다. 오늘 김선욱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연주를 들으면서도 피아노 소리의 음량의 그 넓은 진폭만큼이나 다양한 인간의 감정이 끄집어져 나오는 듯한 베토벤 음악의 깊이에 한참 취할 수 밖에 없었다.

6년전, 성인이 채 되지 않은 김선욱의 연주를 들으며 미래의 거장 피아니스트가 될만한 재목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오늘 김선욱의 연주를 다시 들으며 거장 연주자가 되기 위한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미 거장 연주자의 반열에 올라있는 김선욱의 연주를 보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아마 그 때 다시 오늘을 기억하며 ‘내가 김선욱의 20대 중반 시절 연주를 들었던 적이 있지’하며 꽤나 혼자 뿌듯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시리즈는 앞으로 3번의 공연이 더 남아 있는데 아쉽게도 두 번의 공연은 평일 저녁이라 가기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9월에 예정된 공연은 토요일이라 한번 더 그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앵콜 없이 짧은 커튼 콜로 끝난 이유로 피아니스트 김선욱에게 다 치지 못했던 박수를 글로나마 마저 치고 싶다.

(피아니스트 김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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